상황 #1

  지역농협의 양곡저장창고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조합장을 위시한 조합간부들이다. 모두들 벌개진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하다. 이윽고 창고 문을 열고 들어선 그들은 거대한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진 쌀가마들을 점검하고는 즉석 구수회의를 연다. 밑에 있는 부분들이 시커멓게 썩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조합사무실로 돌아온 간부들은 긴급회의를 열고 썩은 쌀 문제의 대책을 논의한다. 조만간 있을 자체 감사는 어떻게 넘어갈지 모르지만, 몇 개월 후 들이닥칠 중앙 감사팀의 문제는 어찌한단 말인가. 회의는 내부 입단속과 차후 신속한 대책을 강구하는 것으로 끝마친다.

 
상황 #2

  뜨거운 폭염 밑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레미콘 차량을 쇠사슬로 묶은 가운데 레미콘 기사들이 노동조건 개선의 요구사항들을 외치고 있다. 하루에 평균 6회 운행하는 것도 벅찬데 새로이 벌어진 도로공사장 작업은 하루 8회씩의 운행을 요구하고 있다.

  지입차량이라는 조건 때문에 그들 기사들은 레미콘 회사에서 독립적으로 자체 운영하는 개별적인 사업자로 되어있지만, 실제 업무는 회사에서 요구하는 일정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각 탕별로 책정된 요금도 지난 번보다 현저히 낮은 금액이라서 타산을 맞추기 위해서는 하루 2,3회의 증편 운행은 물론 적정량 이상의 물타기도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지입차량의 기사라는 신분 때문에 노조를 조직하지 못하던 그들이 급하게 노조를 만들고 심각해진 노동강도에 저항하고 있으나 노동부에서는 노조를 만들 수 없는 신분이라고 불법파업으로 규정하고 법적처리를 공언하고 있다. 모든 근무조건을 회사에서 정하고 하루의 근무 모두가 회사의 관리감독 하에 있음에도 노동부 지방사무소 근로감독관은 오직 지입차량이라는 문제만을 부각시킨다.

 
상황#3

  3년 전 지역 학교 운동장에서는 국회의원 합동유세가 한창이다. 새로운 도로의 개설과 포장사업을 공약으로 외치는 후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있다. 온갖 공약을 내세우며 그는 이번 선거의 승리를 확신한다. 그리고 그는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당선 후 지역숙원사업들을 추진하던 중 자신의 공약사항을 우선적으로 챙긴다. 그리고 군청 공무원들을 접촉하며 도로사업을 추진한다. 예산이 확보되지 않은 지자체에서는 목하고민에 빠지고 만다. 회의들이 수없이 이어지고 마침내 편법을 동원하기로 결정한다.

  가장 최소한의 추경예산과 예비비를 동원하여 관급공사를 주로 독점하고 있던 지역 레미콘 회사에게 협조를 구한다. 말도 안되는 금액으로 레미콘회사가 시공업자로 결정되는데, 이는 차후 다른 공사에서 보상적인 조치가 취해지리라는 담당공무원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미콘 회사는 하청관계에 있는 지입차주들에게 형편없는 금액을 제시하며 도로공사에 참여할 것을 강요한다. 지입차주들은 그 다음에도 계속 일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울며겨자먹기식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공사를 시작한다.

 
상황 #4

  지역농협 조합장과 간부들이 지역국회의원과 술자리를 하고 있다. 이른바 접대술이다. 여흥이 끝나갈 무렵 조합장이 국회의원에게 창고의 썩은 쌀 문제를 상의하고 해결방법을 부탁한다. 잠시 생각하던 국회의원은 도로사업 관계 공무원을 긴급 호출하고 이번에는 3자가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의논을 한다. 결론은...

  지자체에서 지급할 도로공사 대금을 지역농협의 양곡을 구입하는 것으로 대체하고, 양곡권을 레미콘회사에 현금대신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농협은 썩은 쌀을 판매해버린 것이 되고.... 3자는 환하게 웃으며 건배를 하는데, 뒤에서는 조합간부들이 국회의원과 공무원에게 부지런히 봉투를 건네고 있다.

 
상황 #5

  레미콘회사

화를 참지 못하는 회사간부들의 모습.오늘 공사대금 대신 받아온 양곡권 때문에 일차 난리가 있었지만 그건 약과였다. 하는 수 없이 양곡권으로 인수해온 농협쌀이 대부분 썩은 쌀이었기 때문이다. 강력하게 항의해봤지만 능청스런 조합간부들의 태도도 그렇고, 군청 담당공무원과 국회의원 비서까지 나타나서 막무가내로 상황을 덮어버리는데야...

  그렇지 않아도 지입차주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판에 이번에는 회사 자체까지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판국이다. 원래는 낮은 가격으로 공사를 받아와서 지입차주들 등골만 빼도 회사로서는 별반 손해날 것도 없는 공사였고, 차후 대형 관급공사에 대한 사전 약속까지 받아놓은 터라 실제로는 수입이 짭짤한 대차대조표가 약속된 공사였다.

  그러나 이제 회사도 지입차주들에게 주는 만큼의 손해를 감수해야 할 판이다. 거기다가 저 수많은 썩은 쌀가마들을 어찌 처리한단 말인가~

결국 썩은 쌀이 도착한 운명의 종착역은 풀공장!!!

--- 1987년 여름 경기도 어느 레미컨회사앞에서 지입차주들의 농성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상황의 해결을 위해 논의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터져나온 여러가지 정보들을 취합하여 저 개인적으로 추정 논리를 만들어봤던 내용입니다.
     구체적인 증거는 없고 정황정보를 종합한 결과를 개인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이처럼 서로 얽히고 설켜서 터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봤으면 해서 오래 전 이야기지만 현재 우리 주변의 이야기같은 스토리를 하나 올려봅니다 ---

 

Posted by 탐라공화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