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신문의 부고기사에서 성악가 윤치호선생의 부음을 접했다.
바리톤 성악가로 유명했고, 쇼맨쉽도 대단했던 분이다.

1968년 서울 수유리의 신일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만난 음악선생님이 윤치호선생님이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시원한 음색,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솔직한 표현으로 다가서던 터프한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음악수업이 아이들에게 화제였다.
일주일에 1시간인 음악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해당 반의 주번은 음악실로 달려가
당시로는 천문학적 금액의 시가를 자랑하던 아까이 녹음기를 두명 이상이 낑낑거리며 교실로 운반해왔다.
그 아까이 녹음기는 롤테잎을 걸어서 음을 출력하는 것이었는데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수업종이 울리고 5분은 지나야 나타나는 윤치호선생님.
교탁에 올라서면 테잎을 녹음기에 걸고 학생들을 향해 일갈을 날린다.
모두 책상에 엎드리고 잘 놈은 자고 들을 놈은 눈감고 입다물고 듣는다. 잡소리는 절대 불허!
우리 반의 경우는 대개 4교시, 즉 점심시간 직전 타임이고 아이들은 좋아라 잠을 청하거나 음악을 듣는다.
그렇게 중학교 3년동안 윤치호선생 치하에서 음악시간을 보냈다.

이후 이른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면 모두 귀에 익숙하다. 심지어는 멜로디를 일부 따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곡이라도 곡명도 작곡자도 잘 모른다. 그러나 들어본 곡들이다.
이게 윤치호선생님의 음악교육방식이었다.
음악을 전공할 것도 아니면 몸으로 느끼는 정도면 충분하다는...
그리고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 음악선생님으로 만난 한태근선생님은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
첫 수업시간에 오선지가 그려진 칠판에 몇명씩 차례로 나와서 화음 등의 음표를 그려넣게 했다.
나를 비롯한 절반의 아이들은 완전 우물쭈물, 우왕좌왕~
너희들 중학교때 윤치호선생님 반이었냐? 네에~ 그냥 내려가!!

화성악의 기본도 모르고 악보도 읽을줄 모르지만 그래도 윤치호선생님 치하의 우리들은 음악을 들을 줄은 알았다.

또다른 추억,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윤치호선생
4교시에 음악이 걸린 반은 도시락 수호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당시 시설이 대빵 좋은 신일중고등학교는 보일러 시스템의 라지에이터 난방이었다.
각 교실마다 대형 라지에이터 두개씩이 있는데 겨울이면 도시락을 그 위에 올려놓고 점심시간을 기다린다.
그런데 음악시간에 아이들을 엎어뜨린 윤치호선생은 언제나 그 도시락들을 살금살금 점검하곤 했다.
물론 괜찮은 메뉴는 이것저것 시식도 하면서..자기 도시락이 털리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아이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하도 당하니까 나중에는 음악 시간 시작 전에 도시락을 감추는 사태까지..ㅎㅎ

참 재미있는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같은 친구처럼 놀았다.
남학생들한테 살짝살짝 여자의 신체적인 비밀까지 이야기하는 위험한 도전도 마다않는.
그러다가 연말에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인기투표에서 자기가 3등밖에 못했다고 노골적으로 아이들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천진난만함이라니~

짙은 눈썹, 선이 굵은 얼굴 모습과 웅장하고 큰 울림이 있던 목소리.
학교 졸업 후 텔리비젼을 통해서나 이따금 뵙던 모습인데 이제는 사진에 있는 옛날 젊은 사진뿐이다.
보고싶은 윤치호 선생님.

탐라에서 백영민
Posted by 탐라공화국